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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와 한국교단의 종교재판
"다시 거룩한 교회로"가기 위해서는 피고없이 재판하는 종교재판부터 뜯어 고쳐야"
황규학 (1550)

중세의 종교재판과 한국교단의 종교재판은 별차이가 없었다. 중세의 종교재판은 소명기회는 주었지만 이미 결론은 나 있었다. 절차는 하나의 구실에 불과했다. 한국의 사법부는 어두운 절차를 사실상 묵인하였다. 한국교회의 종교재판은 절차조차 주지않고 답을 내렸다. 모두 전근대적인 인권침해의 재판이었다. 한국 사법부와 중세재판을 통하여 한국교회의 종교재판을 진단해본다.

 

한국사법부는 독재정권시 재판을 하기 전에 박종철사건과 김근태, 김대중 사건의 고문수사를 문제 삼지 않았다. 검찰은 고문을 시켜서라도 억지로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다. 이들 이외에 많은 민주항쟁 인사들은 경찰조사에서부터 고문을 당해 허위자백을 받아내는 등 엄청난 고문 후유증을 가져왔다. 예장통합교단의 전 갈릴리 교회 담임목사, 인명진목사도 도시산업선교회를 이끌면서 수차례 옥에 구속되어 많은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이 엄청나게 컸다고 말했다.

 

그 이외 통합교단의 고영근목사나 문익환, 박형규 목사 등은 형용하기 어려운 고문을 당했다. 우리나라 1986. 6. 10 사건의 민주화 항쟁을 불러인으킨 것도 박종철의 고문사건이 도화선이 되었다. '탁'하고 쳤는 데 '억'하고 죽은 것이 었다. 독재정권이면에는 고문정권이 있었다.  

 

겉으로는 "잘 살아보세"의 새마을 운동이었지만 이면은 인권침해의 고문마을 운동이었다. 전두환정권의 삼청교육대 역시 고문교육대였다. 필자가 수경사 30단에 입단해서 보충교육을 받을 때도 사실상 고문교육으로 수경사가 아니라 고경사 30단이었다. 주기철 목사 역시 고문으로 죽어갔다. 일사각오도 있지만 고문에 의해 죽은 사건이었다. 

 

우리나라는 고문과 구타문화였다. 수경사는 흔히 말하기를 군기가 센 곳라고 하지만 이면은 거의 구타군대였다. 이는 다른 군대도 마찬가지이다. 필자의 시대와 그 이전의 시대는 대부분 군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구타를 경험했을 것이다. 합법적 고문군대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삶이 고문 그 자체였다. 군대는 고문을 통해서 훈련을 하고, 검찰은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내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근안과 정형근은 대표적인 고문기술자들이었다. 독재정권시 한국 법원의 재판은 고문수사를 전제로 하였다. 판사들은 모르쇠로 일관하였다. 

 

불행한 것은 한국종교단체도 육체적 고문을 하지않았지만 정신적 고문을 하기는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믿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판정하여 영적인 고문을 일삼았다. 피고의 출석도 시키지 않은 채 원고와 재판국원들끼리 합의해서 판정하는 이상한 나라의 재판제도였다. 조선시대나 중세시대, 북한, 아프리카 토인들도 소명기회를 주는데 한국장로교단른 소명기회조차 주지않고 예수믿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한다. 타락한 종교재판이다. 중세이상으로 타락한 재판이다.

 

재판이란 무엇인가?


재판이라는 것은 사회적 의미로는 법원이 소송사건에 대해 원고, 피고의 주장을 듣고 그에 대한 법적 판단을 내리는 소송절차를 말하고, 소송법적 의미로는 재판기관이 법원또는 판사가 소송사건에 대해서 내리는 판단 또는 의사표시를 말한다. 그러나 중세시대 재판은 그야말로 신의 이름으로 한 신명재판이자 마녀사냥 재판이었다. 신명재판 이면에는 고문재판이 전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신의 이름을 정당시 했다.  이처럼 종교의 부패와 타락은 법질서의 타락이기도 하다. 

 

시련재판(신명재판)


영국중세사를 보면 시련재판(trial by drdeal)을 한 적이 있다. 일면  재판의 결과는 신만이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므로 신명 재판(神明裁判)이라고도 한다. 시련 재판(試練 裁判, trial by ordeal) 또는 시죄법(試罪法)은 물, 불, 독 등을 써서 피고에게 육체적 고통이나 시련을 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신의 이름을 적당히 끼워놓고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중세의 재판 방법이다. 아래의 재판법들을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유죄로 확정되었다. 시련 재판은 중세 이후 배심원 재판으로 대체되었다.

 

물시련


물의 시련에 의한 재판은 물로 시련을 주면서 피고의 유무죄를 입증하는 방법이다. 피고가 자백하기위해 뜨거운 물에 의한 시죄법에서, 피고는 가마솥의 끓는 물에서 돌 하나를 집어내야 했고, 화상을 붕대로 감은 뒤 3일이 지난 다음 조사하게 되어 있었다. 차가운 물의 시죄법에서는, 피고가 미리 축성(祝聖)된 물속에 들어가야 했다. 그 신성한 물이 피고를 거부하여 피고가 물위로 떠오르면, 신이 거부했다고 보아 유죄로 판결하였고, 피고가 완전히 물속에 잠기면, 신이 그를 받아들였다고 하여 피고는 무죄로 인정되었다. 무죄가 된다는 것은 그대로 익사한다는 것을 뜻하고, 떠올라 익사를 면한 경우는 유죄가 되어 교수형이나 화형에 처해졌다. 어떤식으로 가나 답은 정해졌기 때문에 죽기는 마찬가지였다. 신앙이 지배하던 시절 이러한 재판은 나름대로 일리있다고 받아들여졌다.

 

불시련


불의 시련에 의한 재판은 길을 불로 뒤덮고 피고가 그 위를 걷게 한 뒤, 살면 신의 뜻이 밝히 드러나 무죄, 죽으면 유죄이다. 1차 십자군때 롱기누스의 창의 진위여부를 놓고 피에르 바르톨로뮤는 불의 심판을 받았다. 그리고 화상으로 인해 죽고 말았고 십자군 내에 분열이 생겼다. 끓는 기름의 시련의 재판은 펄펄 끓는 기름에 돌이나 반지 등 작은 물체를 넣고 손 등 신체의 일부를 집어넣어 그 물체를 꺼내게 한 뒤, 상태가 온전하면 무죄이고, 화상을 입거나 상태가 온전치 못하다면 유죄가 된다. 이러한 고문의 방법을 통해서 그들은 신의 뜻을 알 수 있다고 판단했다.

 

독시련

 

독의 시련은 알칼로이드의 독을 가진 칼라바르 콩(Physostigma berenosum)의 추출액을 먹여 살아남으면 무죄로, 이상이 있으면 유죄로 한다.

 

섭식시련

 

섭식의 시련은 마른 빵을 먹고 목으로 무사히 넘기면 무죄, 토하거나 목에 걸리면 유죄이다. 섭식의 시련은 위의 경우와는 반대로 최고위계급인 사제층이 자신들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였다.

 

결국 재판은 원고와 피고에게 창과 방패를 준다. 그리고 둘 중에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워, 죽는 사람이 유죄. 이미 죽은 죄인을 교수대에 매닮으로써 재판이 끝이 난다. 대신 싸워줄 사람을 돈으로 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1215년 라테란 공의회는 이러한 재판이 잔인하다는 이유로 폐지되었다. 실제로 조선시대를 보더라도 자백을 얻기 위하여 고문하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다. 3공화국, 5공화국도 마찬가지이다. 안기부나 중앙정보부는 남산으로 끌고가 형용하기 어려운 고문을 하기도 했다. 자백은 증거의 여왕이기 때문에 검찰은 자백을 받아내고자 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이미 14-15세기에 이러한 재판은 폐지되었다.

 

그래서 영국와 웨일즈는 이러한 재판제도를 폐지하고 배심원제도를 받아들인 것이다. 피고는 증인을 한 명만 대도 유리한 판결을 얻을 수 있었다. 유럽대륙에서는 두 명의 증인이 필요했다. 이는 성서의 정신을 따랐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증거에 의한 재판이 실시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련의 재판(신명재판)은 증거가 필요없었고, 원고측의 억측과 일방적 주장이 증거를 대치하였다.

 

한국 교단의 종교재판, 증거나 피고 필요없어

 

한국의 사법부도 얼마전까지 고문수사를 나몰라라 했다. 종교재판 역시 피고나 증거, 증인이 필요 없었다. 판단자의 의견이 증거이고 법이었다. 피고는 없고 원고만 있었다. 교단이라는 원고측의 일방적 주장으로 피고를 참석시키지고 않고 일방적으로 이단이라고 판정하였다. 늘 원고측에 섰던 이단감별사나 통합이대위는 이단으로 낙인찍힌 피고에 대해 소명기회조차 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중세에서나 볼 수 있는 전근대적인 종교재판 이다. 사실을 왜곡하고 당사자의 소명도 없이 일방적으로 재판을 한 것이다. 이는 사실상 현대판 시련의 재판이다.  이단이 아니라면 신은 하늘에서 정통이라고 음성을 들려주거나 계시를 내려줄 것이라는 것이다.

 

재판의 역사를 보면 이처럼 현대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재판들이 있었다. 주류교단인 통합교단이나 합동교단은 피고의 출석도 없이 원고의 의견제시만으로로 이단으로 정죄한 일이 비일비재했다. 자신들이 신의 대리자라고 판단을 하였다. 그들은 육체적 시련만 주지 않았고, 정신적 시련을 주기는 중세재판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종교재판은 대부분 피고의 소명기회나 출석여부없이 궐석으로 원고나 종교재판국원(이대위원들) 몇사람들이 모여서 일방적으로 이단결정을 하였던 것이다. 이단전문교수들은 이러한 몰상식한 재판에 공범역할을 하였다. 

 

영국의 재판, 15세기 이전에 고문재판 폐지

 

영국은 일찌감치 15세기 이전부터 고문의 사용과 고문으로 획득한 증거의 허용을 완강이 거부하였다. 불행하게도 한국은 최근까지도 고문에 의한 수사가 이루어졌었고, 개신교단에서는 피고없이 원고의 주장만을 갖고 재판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당시 고문을 거부한 영국법의 입장에 대해 프랑스의 볼테르까지 감탄을 하였을 정도이다. 영국법원이 피의자나 증인을 상대로 고문을 거부한데는 세가지 이유가 있었다. 1) 고문은 잔인하다는 것, 2) 참기 힘든 고통이 가해지면 그 고통을 멈추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하게되므로 고문으로 확보한 자백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점, 3) 고문재판은 법원의 권위를 떨어뜨린 것이었다.

 

한국교단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 중의 하나가 재판의 절차하자 이다. 총회에서 전직 총회장을  다수의 결의로 제명시키거나 이단결의를 소명기회나 증거도 없이 원고의 의견으로만 일방적으로 다수가 결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재판은 중세 재판의 부활이다. 중세의 무너짐은 신학적인 요인도 있지만 법절차의 하자도 한 몫을 더했다. 그래서 루터는 중세의 법과 재판에 대해서 비판을 했던 것이다.  

 

한국교단은 여전히 부패하고 타락한 중세재판의 여정을 답습하고 있다. 종교재판은 피고없이 재판을 하는 것에 익숙해 있고, 권징재판은 절차를 준수하지 않고 재판을 하는데 익숙해 있다. 이는 개신교의 타락을 의미한다. 500주년 종교개혁을 맞이하여 개신교는 법과 재판의 질서를 회복해야만 권위가 설 것이다. 유대교의 타락은 율법의 질서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여 화해하게 하소서"라는 구호를 내세워도 다시 갈등과 대립으로 갔고, "다시 거룩한 교회로" 를 구호로 내세워도 '다시 세속한 교회로' 가는 것은 법과 재판의 절서가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거룩한 교회로"가기 위해서는 피고없이 재판하는 종교재판부터 뜯어 고쳐야 하고,  의심스럽거든 피고편에 서지를 않고 힘있는 원고편에 서는 기초적인 재판원칙부터 뜯어 고쳐야 할 것이다.         

 

 


 
기사입력: 2016/11/17 [10:48]  최종편집: ⓒ lawn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