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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법정의 실체적 진실 vs. 가이사법정의 허구적 판단
실체적 진실을 추구한 교단 법정과 허구적 판단을 내린 세상 법정
법과 기독교 (596)
▲     © 법과 기독교


 

 

기독교가 소송이 난무하면서 기독교인들의 사회법정의 의존도가 높아졌고 사회법정의 권위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교회 법정이 나름대로 권위를 세우고자 사회법정의 권위를 무시하고 다른 판결을 내린 적이 있다. 광주 동광교회 사건과 원주제일교회 사건은 대표적 이다.

 

검찰청은 김민식목사건에 대해서 모두 불기소판결을 하였는데 교단법정은 그에게 시무정지 1년을 선고한 바 있다. 원주제일 오인근목사 같은 경우,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는데 교단 총회재판국은 1년 정직을 선고했고 재심재판국은 기각했다.  

 

필자의 경우, 법원은 300만원을 선고하였는데 교단재판국은 무죄를 선포했다. 오인근, 김민식목사건은 사회법정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죄가 되었지만 필자 건은 사회법정에서는 유죄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교단법정에서는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왜 그럴까? 이는 교단법정이 선고의 권위보다 실체적 진실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피고는 2010년  성추행누명으로 법원으로부터 300만원을 선고받았지만 교단은 그로부터 3년 후 실체적 진실을 감안 불기소처분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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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이 이렇게 선고한 이유는 사회법정의 판결과 상관없이 실체적 진실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이다.  고영수라는 30대의 여성이 경찰의 말만 듣고 2008년 4월 14일 이유없이 필자를 고소하였다. 고소장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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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그녀는 2008년 4월 14일 6시 50분쯤 필자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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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4. 14. 18:50분경은 3호선에 고영수씨에 대해서 성추행을 한 것이 아니라 지하철 2호선에서 유호남 장로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12번 착신의 유호남 장로와의 통화는 4월 14일 6:50분에 행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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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인은 경찰진술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했다기 보다는 경찰관이 이를 목격했다고 했다. 그리고 처음 본 사람이었다고 진술했다. 고소장과 경찰진술은 6시 50분이었는데 경찰이 목격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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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영수라는 여자는 법정증언에서 경찰의 진술때와는 달리 말을 뒤집었다. 6시 50분에 성추행을 당한 것이 아니라 6시 30분에 성추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변호사가 묻자, 그녀는 6시 30분경에 성추행을 당했다고 진술했고 필자를 본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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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검찰의 기소장은 고영수씨의 원래의 고소장대로 6시 50분으로 성추행을 했다고 기소를 했다. 법원도 6시 50분으로 맞추어 유죄선고를 하였다. 고소장이 그대로 판결문까지 이어진 것이다. 검찰과 판사는 얼굴도 알지 못하는 고소인의 고소장을 그대로 복사했다. 그녀의 법정증언은 성추행당한 시간이 6시 30분이었지만 판결선고는 6시 50분으로 맞추었다. 전화내역을 알겠지만 그 날은 너무나도 많은 전화를 하여 성추행을 할 시간적 여유 조차 없었다. 그것도 지하철 신도림역으로 가는 2호선에 전화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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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증거의 요지에 고영수와 경찰의 증언을 토대로 했다. 고영수의 증언은 생면부지의 사람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일관성과 근거가 없었고, 경찰은 최소한 사진이라는 증거조차 하나 없었다. 거짓진술로 사진찍은 것이 있다며 고소인을 부추키고 자신들의 진술이외에 증거하나 없었다. 그리고 고소인의 고소장이 공소장이 되고 결국 판결문이 되었다. 증거 사진 한 장 없었고 알리바이를 구성할 연결고리조차 없었고 경찰의 거짓 진술과 고소인의 모방진술, 판사의 왜곡판결만이 있었다. 

 

경찰은 판사의 "사진이 있는냐"는 질문에 "없다"고  대답하여 기초적인 증거사진조차 없었다. 그러나 판결은 선고했다. 증거없는 경찰과 모방진술의 고영수의 진술만이 증거의 요지였다. 그러다 보니 실체적 진실을 가장한 왜곡 판단만이 있었다.  잘못되고 허위진술인 고영수의 증거가 판결의 근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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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고영수의 증언을 보자. 그녀는 경찰진술과 달리 6시 50분이 아니라 6시 30분을 주장했고, 필자를 처음 본 것이 아니라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진술의 일관성이 없는데 판사는 그녀의 말을 증거요지로 채택했다. 

 

고영수는 성추행을 당한 시점은 4월 14일 6시 30 혼잡할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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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필자를 본 적도 없다고 하면서 필자에게 성 추행을 당했느냐는 질의에 "예"라고 대답했다.  고소이유는 여경이 사진찰영을 하였다고 하여 고소를 하라고 해서 고소를 하게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은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고소장을 제출하게 되었다.

 

경찰의 잘못된 진술과 판사의 왜곡된 판단이 한 인간을 유죄로 만들었던 것이다.  실체적 진실은 사라지고, 판사의 권위적인 판단이 실체적 진실을 대신했다. 사진 한 장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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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소인은 본인이 아니라 경찰의 목격담에 입각하여 진술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즉 경찰이 시키는 대로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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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경찰진술조사에서는 처음 본 사람이었다고 진술했다. 이것도 거짓말이었다. 그는 필자를 보지 못했다고 법정증언에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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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끊임없이 전화를 통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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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소인은 법정증언에서는 통화하는 것도 목격한 바가 없고, 심지어 옷차림에 대해서도 기억하지 못하고, 증인의 얼굴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고, 얼굴은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여경이 사진을 찍었으니 고소하라고 했지만 자신은 정작 사진을 확인조차 하지 못했고 필자가 많은 통화를 하였지만 고소인은 정작 한번도 통화하는 것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했다. 

 

고소인도 필자를 모른 상태에서 경찰의 목격담만 듣고 진술조사를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사진도 확인을 하지 않았다. 경찰의 목격담이나 소설에 의하여 고소인 진술을 받았던 것이다. 필자에 대해서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경찰과 한 고소인의 소설이 무고한 시민을 사실적 유죄로 만들었던 것이다. 허구의 사실화이다. 법원을 통하여 허구가 사실로 세탁된다. 그래서 누명을 쓴 사람들은 실체적 진실에 울고 있는 것이다.  

  

고소인은 상대방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추행을 당했고 고소를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최소한의 근거없이 경찰의 목격담만 듣고 고소를 한 것이다.

  

필자의 당시 상황은 익일 핀란드로 떠나기 위해서 2호선을 타고 신도림역에 들러 아는 약사 권사님한테 약을 얻어 핀란드한인교회 유학생들을 위하여 기증하려 했고, 갈릴리 교회 인명진목사를  만나 핀란드여당과 당시 한나라당을 연결 시키려고 하였다. 당시 황대진이라는 분이 핀란드의 한인회장이면서 핀란드 중도당 지구당위원장이었기 때문에 한나라당과 핀란드당을 연결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 날은 유독 전화가 많았다. 그러나 고소녀는 필자가 통화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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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날 쉬지않고 많은 통화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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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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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당시 강동구청역 근처 강동경찰서에서 이길원이 고발한 건에 대해서 조사받고 5호선 강동구청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잠실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야 했다. 2호선을 타고 신도림역 근처 아는 약국을 하는 약사권사와 인명진목사를 만나기 위해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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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호선을 타고 가는 도중에 상술했듯이 핀란드 한인회장, 이기용장로, 집, 유호남장로 등 전화통화를 계속 했다. 이러한 내용들은 전화내역에 그대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최종진술에서 필자는 최삼경이나 진용식의 허위사실과 달리 공소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최삼경과 진용식은 필자가 공소사실을 인정한다고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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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내역  15번의 이기용장로도 6시  37분, 6시 58분에 두차레에 걸쳐서 2-3분간 통화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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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주씨는 자신이 상의는 아이보리색, 치마는 옅은 밤색으로 된 옷을 입었다고 했고, 필자는 앞에 있는 여성은 20대로서 노란색 계통의 옷을 입었다고 했다. 서로의 진술도 맞지 않았다. 사람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년는 3호선, 필자는 2호선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은 필자에게 30대 여성이라고 쓰라고 했다. 진술은 경찰의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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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고영수라는 여인에 대해서는 누군가 3호선 교대역 6시 50분에 성추행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걸어가는 필자를 지목하고 어떤 근거나 증거도 없이 현행범 체포 하여 무조건 경찰서로 끌고가서 강제로 조사를 했던 것이다.  판사는 시간, 노선, 전화내역, 인상착의 등 어떤 근거도 없이 필자에게 유죄판결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필자는 실체적 진실을 추구하고자 오히려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고 가해자신분이 피해자에 대해서 손해배상청구를 하였다. 그러나 고영수씨는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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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피해자는 고소인의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하고, 고소인도 필자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고소를 하였고 필자는 유죄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교단은 필자에 대해서 불기소처분을 하고, 변호사와 검사, 법전문대 교수들이 학위논문자를 위한 자격심사에서 하자없다고 판단하였다.

 

판사의 허구적 판단보다 실체적 진실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성추행의 문제는 실체적 진실이 있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누명을 쓰거나 왜곡된 판단으로 유죄가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즉 판사의 허구적  판단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오00씨는 유모의 아기처럼 신령한 젖을 빨라는 설교를 하다가 중학생이 갑자기 일어나서 젖을 빠는 시늉을 했다가 아동성추행범으로 들어가 2년 선고를 받았다. 필자의 아는 한 교인은 장애자가 농담을 걸어오자 성적인 농담을 하다가  몰래 녹화를 당하여 장애인 성희롱과 성추행으로 2년 형을 받은 바 있다.

 

교회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한 목사는 아이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다가 재일교포의 학생의 거짓진술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법원은 대부분 아동과 여인, 경찰의  진술을 우선 채택한다. 그러다보면 누명이나 억울한 일이 많이 발생한다. 이러한 억울함을 풀어줄 곳이 교단 법정이다. 대신 더 엄격하고 양심적이고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

 

필자는 교회법정의 불기소처분으로 위로를 받을 수 밖에 없다.  법원의 허구적  판단이 교단의 법정을 통하여 실체적 진실이 밝혀졌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절차적 진실보다 실체적 진실이다. 실체적 진실을 위하여 절차적 진실이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실재 성추행범도 많이 있지만 성추행누명자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역사는 요셉 부터 다니엘, 예수, 바울 등 모두 누명의 재판의 역사 이다. 증거와 근거없이 허구의 판단에 의해 고통을 당한 것으로 실체적 진실이 울고있는 사례들이다. 최근에 박원영목사도 아이티문제로 많은 누명을 당했다고 눈문을 흘리기도 했다. 누명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 되어지고 있다. 박종철도 결국 누명으로 죽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는 실체적 진실보다 진실이라고 선고하는 판사의 판결만이 실체적 진실이 되다 보니 누명자들이 속출하는 것 이다. 절차적 진실은 있는데 실체적 진실이 없다. 왜곡된 판단도 법원의 세탁을 통하여 실체적 진실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변호사들 70%가 형사재판에 문제점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회법정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앞으로 교단법정이라도 양심의 자유, 교회의 자유의 토대하에서 실체적 진실을 추구하여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괴로워 하는 사람들의 한을 풀어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요셉의 눈물과 한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사회에 수많은 요셉의 눈물이 있다. 교회법정은 이러한 억울한 사람들의 누명을 풀어주기 위하여 권위있는 기관이 되어 실체적 진실을 바로 파악하는 재심재판을 할 필요가 있다. 절차는 실체적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양심이 살아야 절차도 살고  실체도 밝혀지는 것이다. 그래야 교회법정이 사는 것이다. 이처럼 한 여인의 무책임한 고소와 경찰의 허위진술, 판사의 왜곡적 판단이 한 인간의 인격을 추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교단법정의 실체적 진실찾기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늦게마나 박약한 증거로 억울하게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을 교단이 재심하여 정신적이나마 실체적 진실을 밝혀줄 필요성이 있다. 

 

필자도 이 글을 늦게나마 쓰는 이유는 이 사건을 변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법정도 얼마나 증거가 부족한 채 권위적으로 판단하는지, 절차를 중시하지만 얼마나 실체적 진실에 벗어나는지, 우리가 얼마나 10년 전의 사건에 집착하는지, 그리고 교단법정이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여 영국의 형평법처럼 억울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고 누명을 씻어주는 역할을 하고, 나아가 사회법정이 하지 못하는 신앙과 윤리를 위해 실체적 진실을 밝혀주기 위함이다.

 

인류의 역사는 왜곡된 재판의 역사이자 허구적 판결의 연속이다.  이제 교단 법정은 무조건 세상 법정의 판결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세상 법정이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지 못할 경우, 교단 자율적으로 판결하여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는 창조적 판결의 시대가 와야 할 것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힘 있는 로펌, 이러한 시대에서 벗어나서 교단의 양심 있는 판결의 시대가 올 때, 기독교는 더 권위를 갖지 않을까? 그러므로 사회법정이 유죄라고 판결해도 교단은 무죄, 사회법정이 무죄라고 판결해도 교단법정은 유죄라고 판단하는 권위있는 자율적 시대가 와야 교단법정의 권위를 높이고 가이사법정을 의존하지 않게 될 것이다.

 

광주동광교회, 원주제일교회, 필자의 사건은 사회법정의 결과에 상관없이 교단법정의 자율적 판단으로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고자 하여 교단법적 권위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가이사법정에서 2호선은 3호선으로, 유호남장로와의 통화는 사라지고 성추행현장으로, 20대 노란색 원피를 입은 여학생은 30대의 아이보리색과 검은색치마를 입은 여성으로 왜곡된 사실로 변화시켰다.

 

가이사법정은 국가의 힘과 권력을 갖고 실체적 진실을 허구의 사건으로 세탁했던 것이다.  실체적 진실의 팩트가 없이 국가의 힘을 갖고서 소설식 허구의 판결문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교단법정이 실체적 진실을 추구했다.   

교단법정이 양심으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고자 할 때 가이사법정에서 놓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게 될 것이고, 교단법정이 실체적 진실에 도달하려고 노력할 때, 교단법정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대신 교단 법정이 양심적이고 전문성있고, 진실해야 한다.

 

 

      김민식목사 사회법정은 무죄, 교단법정은 유죄

      http://www.lawnchurch.com/sub_read.html?uid=5605&section=sc50&section2=

 

     오인근목사, 사회법정은 무죄, 교단법정은 유죄

      http://www.kidogkongbo.com/124

 


 
기사입력: 2017/08/19 [22:56]  최종편집: ⓒ lawn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