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통합교단, 대의 정치의 실종
대의 정치는 토론을 전제해야
법과 기독교 (449)

 

▲     © 기독공보

 

 

 

장로교단은 대의 정치교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회, 노회, 총회는 대의 정치의 산물이다. 교인들이 대표를 선출하여 당회를 구성하고, 당회원들이 노회에 참여하여 총회에 갈 총대를 선출한다. 그러므로 총회에 참여하는 총대들은 당회원이자, 노회원으로 이미 2중적인 대의 정치를 통하여 선출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대의정치를 실현해야 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장로교단에서 대의정치가 행해지지 않고 있다.  이는 대의정치가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다가 총회에 참여하는 총대들은 대부분 80%이상이 60대 이상이기 때문에 대의정치를 실현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대의정은 직접민주정치를 토대로 하는 민주정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하여 영국에서 채택된 의회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의 약점은 지적수준이 결여된 다수에 의해 끌려가는 정치체제이다. 이러한 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국민들은 지적으로 뛰어난 대의원들을 선택하여 국회로 보내어 그들이 무능한 다수를 대신하는 대의 정치를 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대의정치는 귀족정에서 출발한다. 유능한 귀족들이 국가의 통치를 하는 것이다. 귀족들은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높은 수준의 정신적 능력과 뛰어난 활동력을 과시하였다.

 

귀족정과 의회민주주의

 

그러나 영국의 귀족들은 무능함의 극치였다. 귀족들이 전문성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전문성대신 권위만들 추구하였다. 로마의 귀족정이 관료제의 병폐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선거에 의한 민주적 요소때문이었다. 그런데다가 로마의 귀족정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문성이었다. 귀족정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귀족의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 이같은 전제가 충족되지 않으면 숙련된 민주주의가 전혀 일어날 수 없다. 민주주의가 감독과 견제라는 주어진 과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정신적 탁월성을 개발해야 한다. 특히 대의정치는 더욱 그렇다. 의회민주주의가 적정수준의 탁월성에 이르지 못한다면 이런 저런 행동으로 행정부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이를테면 행정부 장관은 쫏겨나고 그 대신 질이 떨어진 사람을 옹호하고 뒷받침하게 될 것이다. 좋은 법은 폐기하고 나쁜 법을 들여올 것이다. 오늘날 한국장로교단의 현실이다.

 

귀족정이나 군주정에서는 공동체가 요구하는 일반 이익과 상반되는 행동을 해야 집단적 또는 개별 구성원의 이익이 잘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왕과 고위 귀족들은 백성에 대한 무제한의 권력을 보유하고 행사하고 싶어한다. 귀족정이든, 군주정이든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부당한 특권을 다양하게 확보하려고 한다. 그래서 때로는 인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해서 자신의 호주머니를 채우려 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을 더 높이 세우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낮은 위치에 몰아 넣으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은 한국장로교회에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다. 

 

왕이나 귀족이 다스리는 정체에서는 이러한 지배계급의 이익만을 강조한다. 그러면 민주주의는 이러한 병적인 현상과 거리가 멀것인가? 민주주의는 통상적으로 다수파에 의한 지배라고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항시 다수결을 강조하고 있다. 

 

총회나 교회에서도 다수결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다수결이 강조되다 보면 지배권력이 특정집단 또는 계급의 이해관계에 의해 휘둘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지배권력이 사회전체의 이익을 지행하는 불편부당한 관점과 배치되는 행동을 취할수도 있다는 말이다. 백인이 다수이고 흑인이 소수인 경우, 아니 정반대인 경우 다수가 소수에게 평등한 정의를 허용할 수 있을까? 카톨릭신자가 다수이고 개신교가 소수인 경우, 반대인 경우에도 같은 위험이 존재하지 않을까? 교단에서도 경상도가 다수이고 호남이 소수이거나, 그 반대인 경우에도 평등한 정의를 허용할 수 있을까?

 

총회의 문제점

 

지난번 102회 총회시 통과고된 안건들은 대부분 법을 위배하였어도 다수의 결의에 의해 통과 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현상을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장로교는 민주정치의 토대를 구축하는데, 그러면 총회는 다수결에 의한 민주주의를 실현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민주주의의 단점 중의 하나인 무능한 다수의 승리라고 말할수는 없었을까? 민주주의를 추구한 윤보선, 김대중에 대한 박정희의 승리는 무능한 다수 민중들의 승리가 아니었는가? 다수결은 독재주의자를 선택했다. 미국의 다수는 트럼프를 선택했다. 민주주의의 한계는 지적으로 무능한 다수의 선택에 있다. 가부간의 결정으로 결론을 낼 수 밖에 없는 것이 회의의 한계이지만 다수결로 인해서 법까지 초월하는 무능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102차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문제점은 법까지 무시하는 다수에 의해 결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은 다수결에 의해 모든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대의정은 지적으로 무능한 다수결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하여 지적으로 유능한 의원들의 충분한 토론을 통하여 형성되는 민주주의의 형태이다. 그래서 어떤 사회든지 대의정을 운용할만한 수준에 오른 사회라면 어느 곳에서든지 시민들이 일정 수준의 양심과 지성, 사심없는 공공정신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장통합교단은 대의정을 이룰만한 수준에 오른 교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장로교의 대의정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토론 민주주의가 발달해야 한다. 영국의 의회민주주가 발전한 것은 토론의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한국교장로교단 대의정의 문제점

 

한국장로교단의 문제점은 대의정임에도 불구하고 토론이 없다. 대부분 냄비근성으로 그 때 그 때마다 정서와 감정에 이끌려 토론없이 가부간의 의사결정을 한다. 그러다 보니 후유증이 발생하게 된다. 100회 총회시 이단사면철회의 문제도 토론없이 일사천리로 무효화 되었고, 금년에 동성애에 대한 안건도 토론없이 가부간으로 통과되었고, 인사문제, 안수문제, 사고노회, 특별재심결의 등이 대부분 토론없이 일사천리로 가부간 결정을 하였다. 이는 대의정의 부재에 기인한다. 대의정은 토론에 기초하여 가부간 투표를 하는 정체이다. 

 

토론없는 대의정은 죽은 대의정이다. 토론없는 다수결의 결정은 지성보다는 정서와 감정에 기초한 무능한 다수에 의해 휘둘릴 가능성이 높다. 대의정은 지적으로 유능한 의원들의 충분한 토론을 통하여 형성되는 민주주의 이다.

 

특히 장로교단의 대의정은 대의원들이 한편으로는 위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대의해야 하고, 아래로는 자신들을 선출해준 회원들의 뜻을 대의하는 것이다하나님의 뜻을 대의한다는 것은 보편적으로는 성경과 교단헌법, 개인적으로는 신앙양심과 정의를 통해 대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선택해준 유권자의 의사를 대의하는 것이다.  

 

대의정의 대표는 자신의 의사와 결정을 대의할 것이 아니라 다른 대의원들이 각자의 의견을 개진하고 충분히 토론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 좋은 결론이 도출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 사회자의 권한을 가졌다고 하여 무소불위로 불법, 편법 상관없이 안건을 통과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의정치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무능한 사회자가 되는 것이다.  대의정은 고도의 지적으로 훈련받은 사람들만이 실천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형태이다. 불행하게도 고도의 지적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이 없다면 성총회가 무능한 다수에 의해 끌려가는 천박한 민주주의로 전락하는 것이다.

 

교단의 재판 역시 무능한 다수에 의해 판결이 되다 보니 바람 잘 날이 없고, 결국 1년조, 2년조가 또다른 다수결에 의해서 해체 되었다. 재판국원들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토론이 있어야 했다. 지적으로 무능한 다수에 의해서 회의가 주도되다 보니 모든 것을 다수결의 표결처리를 하였다.  특별재심 사유도 충분한 토론없이 즉결 심판식으로 가부간으로 결정하였다. 이는 대의정의 실종인 것이다. 형태는 당회, 노회를 통하여 선출된 대의원들이지만 내용은 토론없는 무능한 다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사회자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충분한 토론의 기회를 주어야 했는데 토론없이 속전속결 처리하였다. 그것도 교단의 헌법을 위배한 채 말이다. 총회의 결의가 교단헌법을 초월하였고, 결의가 오히려 상위법이 되었다.  이는 사회자가 대의정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술했지만 토론없는 대의정은 지적으로 무능한 다수에 의해서 끌려가게 되어 있다.  토론없는 대의정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만 대변하는 일종의 귀족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귀족정에서 삼두정치가 나타나게 되고, 결국 특권자들의 독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독재정이나 군주정은 대의 정치의 소산인 다수의 결의와 특정부서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결정을 존중하는 정체이다.

 

서울남노회와 서울 동남 노회의 하극상

 

하위 치리회는 최고 치리회의 결정을 존중해야 하고, 의장은 총회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작금의 예장통합교단의 문제는 총회재판국에서 결정한 내용을 하위치리히인 노회에서 준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치리회의 무정부상태로 된다. 효성교회에 대한 서울 남노회의 행동은 무정부상태의 일환이자 대의 정치의 부재에 기인한다. 노회가 총회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다 보니 재판만 수십번하게 만든다. 이는 대의 정치의 부재에서 오는 노회의 횡포이다. 대의 정치를 안다면 이러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대의정치를 모르는 다수 노회원들의 무능함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총회임원회는 본체 만체하고 힘없는 사람만 기소처리 한다. 명성교회와 관련한 서울 동남노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노회가 총회 헌법위원회의 결정을 준수하지 않는 것은  하위 치리회의 하극상 이자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동남노회는 헌법위원회의 결정을 지체없이 시행해야 하는데 이를 주저하고 있다. 상회치리회가 결정했다면 하회치리회인 노회는 이를 준수할 필요가 있다. 결국 동남노회도 서울 남노회의 길을 걷고 있다.     

 

작금의 예장통합교단의 문제는 총회재판국이나 헌법위원회가 결정한 것을 하위 치리회인 노회가 준수하지 않고, 총회장이 총회헌법위의 결정을 준수하지 않고 제멋대로 해석을 하는 것이다. 장로교의 정체는 대의정이다. 대의정은 고도의 지적으로 숙련되고, 의회정치에 익숙하고, 상위치리회의 결정을 존중하고, 개인의 파워보다 단체의 파워를 중시하고, 자신의 의견보다 자신을 선택한 유권자의 의견을 우선하는 것이다. 그리고 회의를 통해서는 교단법 아래서 결의가 되어야 하고, 토론을 통해서 다수결로 결의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적법한 민주적인 절차를 통한 결의는 준수해야 하고, 개인의 의견을 삼가고 단체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총회장과 총대들은 대의정의 본질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기사입력: 2017/10/01 [00:58]  최종편집: ⓒ lawnchurch